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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인터뷰]  (사)한국휘트니스협회  최명희 이사장
[인물인터뷰] (사)한국휘트니스협회 최명희 이사장
(사)한국휘트니스협회 최명희 이사장 Q.70년대만해도 생소했던 에어로빅을 국내에 최초로 도입, 전국민의 운동으로 만들기까지 큰 족적을 남긴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도입초기 당시 주변의 반응이 궁금하다 ▶초기 에어로빅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했다 아무래도 처음 접하는 생소한 동작들이다보니 운동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게 컸던것 같다 춤과 운동사이의 혼란^^이라고 할까그래서 이런 에어로빅 인식을 바꾸기 위해 유행가가사처럼 (어디든지 달려갈거야~^^ )어디든지 뛰어다녔다. Q.학창시절에는 한국무용을 전공했던데 전향의 계기가 있는가 ▶한국무용으로 실력을 쌓아가고 있을 무렵 나를 지지해주던 스승이 돌아가시게 되었다 버팀목과 같은 스승의 부재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에어로빅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된것이다. 지나고 보니 신의한수 였다. 그러나 육성한 제자가 2천명에 달하지만 정작 나에겐 스승이 없다 새로운 길에 대한 고독하고 혹독한 댓가를 치른셈이다. Q.일본정통 에어로빅을 국내에 최초로 도입 협회를 설립 부산 광복동번화가에 자리잡은 이유가 있는가 ▶그렇다 그 당시 부산하면 보통 해운대였지만 관광지 이미지가 강해서 난 과감히 광복동을 선택했다 패션과 젊음이있고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었으니까 에어로빅 본부가 부산 광복동이라는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판단 여기서 시작 전국적으로 확산을 시키게 되었다 단순히 가르치는 것을 넘어 KAFA를 브랜드화해서 전국으로 보급시켰다. Q.예술적 끼와 재능뿐만 아니라 사업적 마인드가 엿보이는데 부모님과 자라온 배경이 궁금하다 ▶그렇다 나는 사업가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젠틀하시고 스마트하신 팔방미인이셨다 아버지 유전자를 물려받은걸까? 사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다가 경영학으로 전과를 했다 KAFA를 운영하면서 전문적 경영공부의 필요성을 절감 학문적 이론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2007년 동아대에서 박사졸업했는데 학위논문이 고객전환장벽을 위한 연구다. Q. 이력서 두 장 이 빽빽하다 몇가지만 소개 해달라 2002년 아시안게임추진위원회제 12회 부산 동아시아 경기대회 및 제 4회 아시아경기조직위원회 전문위원 문화식전안무가제 14회 부산아시아 경기대회 조직위원회 개폐막식안무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개회식전 및 폐막 안무 제작 및 지도등에어로빅을 세계무대에 알린 계기들이다이런 국제대회에서 한국과 한국의 에어로빅을 알릴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Q.예술적 감각 그리고 경영마인드를 겸비 과감한 돌파력으로 한국휘트니스협회를 오늘에 이르게 한것 같다 이제 인생2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단체협의회 얘기를 듣고 싶다 ▶34세에 입문 24년만에 제 26대 회장에 오르게 되었다10만 회원 아우르기, 여권신장에 주력했고 임기시작 8개월만에 협회사무실을 이전 오랜 숙원을 해결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것은 체육단체회장이 나왔다는거다. 여권신장뿐만 아니라 에어로빅을 정식종목단체 만드는 과정에서도 많은 눈물을 쏟았는데.. 누구보다 나는 여성체육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하다.처음에는 에어로빅 인식전환과 입지를 확보하기위한 짧은 생각으로 여협에 들어갔고 에어로빅 지키기에 급급했는데 가서 여러 여성단체를 접하고 회장을 지내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체육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단체가 전문화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여성건강, 여성체육, 인권으로 까지 관심이 커진것이다. Q.여성체육인으로 시체육회부회장 일을 했는데 ▶체육회이사, 2002 아시안게임, 체조협회, 생활체육회 활동을 했고 여성단체활동 24년 마치고, 여성체육인으로 당당히 부회장이 되었고, 여성체육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도전의 끝은 어디인가 Q.백세시대를 위한 남 다른 준비를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다 ▶초고령사회로 곧 접어드는데, 시니어 실버대상 건강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싶다. 그래서 유투브를 준비중이다 이제 인생마지막 꿈은 대한민국 국민 건강지킴이가되어 건강을 선물하고 싶다 가칭 “최명희의 건강운동 건강을 전파하는 건전지“ 내 인생 3막의 키워드는 단연코 봉사 Q.파란만장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도전과 성공에 박수를 보낸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돌아보면 20~40대는 도전의 기쁨이 50대는 아픔과 좌절의 시간이 많았다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어머니의 안목' 이 힘이 되었다이제 대한민국 여성 체육인으로서 건강운동을 통해 여성건강과 사회적약자 소외계층을 위한봉사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인물인터뷰] 부드러운 카리스마  "김해시소상공인연합회 재임 양대복 회장"
[인물인터뷰] 부드러운 카리스마 "김해시소상공인연합회 재임 양대복 회장"
--열악한 기반에서 살아움직이는 연합회로--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지역에 힘이 되는, 시민과 함께하는 단체로 --사회복지 전공살려 사람과 사람을 연결--소상공인의 자부심과 가치를 높여 김해시소상공인연합회 회장 양대복 Q 우선 재임을 축하한다 재임절차가 까다로웠다고 들었다. A 그렇다. 정랑적 평가와 정성적 평가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당당하게 승인.인준까지 받았다. 경남도내 14군데 가운데 연임 신청을 한 곳이 밀양과 김해 두곳으로 경남도 1호 회장이 된 셈이다. Q 재임은 곧 많은 일들을 잘 해냈다는 결론인데 자세하게 들려달라. A 사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보면 된다. 처음 회장직을 맡았을 때 기반자체가 전무했다. 정회원수가 부족했고, 사업예산은 제로에 가까웠고, 직능단체별 결속력도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친목단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는 점이 가장 안타까웠다.우선 우리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었다 장사꾼이 아닌 지역의 중심으로서의 역량을 이끌어 내고 지역에 환원하고 시민과 함께 함께 하는일 그렇게 했을때 소비자가 돌아올거라 믿었다. 바뀐 시대만큼 우리도 바뀌어야지 그래서 지난해 6월6일 호국보훈의 행사를 주최 경남일원의 유치원, 초등학교 대상 사생대회 글짓기대회를 열었고 시민과 함께하는 해반천걷기대회도 했다. 초창기 예산확보에 어려움이 컸다 기존 사업실적이 없다보니.. 회원들의 재무 법 행정 금융 민원을 돕기위해 민원콜센터를 운영한다. 그 외에도 상생포럼, SNS 홍보, 취창업박람회, Zero Pay까지 바쁘게 움직였던거 같다 현재 3만5천 업소와 5백 여 명의 정회원이 활발히 활동중이다. Q. 많은 일을 했고 소상공인에 대한 애착과 상생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엿보인다 얘기를 듣다보니 문득 전공이 궁금해진다. A 대학에서는 행정을 전공했는데 사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게 중요하더라 그래서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Q 김해 코스코입점에 관한 질문을 안할수가 없다. 소상공인연합회의 입점반대가 자칫 집단이기주의로 비춰 질 수 있는데... A 맞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거대 기업 코스트코가 들어온다면 교통대란은 불가피할 것이고 지역예치금 제로에 자본의 국외유출은 뻔할것이다 지금도 서김해IC에서 북부동까지 출퇴근시간에 30분이 걸릴정도로 포화상태다. 이렇다할 교통체증대비책도 내놓지 않고 입점을 한다면 교통지옥이 되지않겠나 일대 집값도 영향을 받게되고, 골목상권 걱정 앞서는거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거시적 차원의 이유로 합리적 반대를 하는것이 현재 우리 입장이다. Q 경제적으로 많이들 힘들어한다 점점 각박해져가는데 회원들과 김해시민에게 응원의 메세지를 A 무분별한 대규모점포입점과 그벽한 최저임금상승, 시장경기악화로 지역상권이 많이 소멸되었고, 매출또한 많이 격감한 상태다. 이럴때일수록 3만5천업소와 8만 종사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드리고 싶다. 앞에 언급했듯이 김해시 경제국과 힘을모아 민원콜센터 세무 금융 법률 행정 노무등의 어려움을 적극지원해드리고 혼자가아닌 우이라는 소상공인이라믿고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란다. 시민들께서도 소상공인은 단순히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것이아닌 김해시민과 함께하는 김해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제단체의 CEO라고 믿어 주시길바란다. 아울러 김해의 그어떤 대규모점포입점도 최소한의 요건을 충족하지못하고 무분별한 입점은 시민의 불편과 발목을 잡는것이므로 연합회차원에서 단호히 막을것이다. 시민과함께하는 시민속의 사랑받는 소상공인 연합회가 될 것 을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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