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의 동양철학 풍경(7)

이근원통과 천수천안
기사입력 2019.01.2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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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동명대학교 글로벌문화콘텐츠학부 교수)

빌고 또 빌어야 하는 사람들이 비는 대상으로 불교에 관음보살이 있다. 이 관음보살을 수식하는 용어로 흔히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근원통(耳根圓通)이고 또 하나는 천수천안(千手千眼)이다. 이근원통의 관음보살은 잘 살피는[Avalokita, 觀] 신[iśvara, 神]이라는 뜻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보는 것[觀世音]으로 세상을 구제한다.

 
이근원통의 주된 상징성은 원(圓)에 있다. 그의 살핌이 지극한 까닭은 원(圓) 때문이다. 원은 ‘고르다’(regular, even)는 의미이다. 이근원통은 온갖 소리를 다 ‘골고루’ 들어주는 능력인 것이다. 온갖 소리를 고르게 들어낼 수 있는 공능(功能)을 지닌 존재가 바로 관음보살이다.
 
모나지 않고, 편파적이지 않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고르게 동그란 원 모양이 바로 이근원통의 상징성이다. 중생은 고르게 듣지 못한다. 듣고 싶은 소리만 골라서 듣거나 듣고 싶은 소리로 바꾸어 듣는다. 그래서 중생이다. 하지만 보살은 다르다. 원통(圓通)은 편들지 않고 가리지 않는 능력이다.
 
천수천안은 천(千)이라는 숫자에서 보듯이 무궁무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눈으로 보기도 엄청나게 보고, 손으로 살피기도 엄청나게 살핀다는 뜻이 바로 천수천안이다. 그런데 중생을 구제하는 데 왜 굳이 천 개의 눈, 천 개의 손이 필요한 것일까. 이미 보살이라고 전제했는데 두 눈과 양손만으로 부족한 것일까.
 
천수천안의 상징성은 ‘빠짐없이 모두’ 구원해 준다는 양적인 면에 있다기보다는, ‘순서 없이’를 강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두 눈과 두 손만으로도 모두를 구원할 수는 있겠지만, 구원의 ‘순서’는 어쩔 수 없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천수천안이 되면 전부 ‘한꺼번에’ 구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부산뉴스 기자 bs@bus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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