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찰(察)과 간(看)이다. 관찰, 시찰, 고찰, 통찰 같은 말들이 찰에 해당된다. 그리고 간주, 간과, 간판, 주마간산 같은 말들은 간에 해당된다. 몇 가지 단어만 살펴봐도 간보다는 찰이 좀 어려워 보인다. 세심하게 구분해보면 간은 겉모양에 집중해서 보는 것이다. 이에 비해 찰은 겉으로 보이는 유형(有形)의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춰진 원리나 관계 같은 무형(無形)의 것을 보는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한자어 찰을 풀이하면서 ‘뒤집어 살피는 것[覆審]’이라고 했다. 요즘말로 하면 찰은 반성적 인식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맹자(孟子)>에도 보면 “인륜을 살핀다[察於人倫]”는 구절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물의 이면에 있는 원리나 관계를 본다는 의미이다.
찰은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어떤 원리와 관계성을 꿰뚫어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찰을 잘 하려고 하면 또 다른 보는 형태인 간에 너무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통찰을 꿈꾸는 자는 즉물적 사실의 무게를 그냥 봐 넘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된다. 유형은 무형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형의 것들은 늘 꿰뚫어 살피고자 하는 우리의 눈을 가린다.
원리는 유형의 것들이 억겁동안 퇴적된 다음에야 비로소 흘러나오는 침전물이다. 그 세월은 유형의 것들이 존속된 시간이고, 인간이 그것들과 부대낀 시간이고, 그래서 짠한 시간이다. 이 가혹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 줄도 모른 체, 우리는 유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이가 들었고 또 언젠가는 처음 왔을 그 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가을은 이런 세상의 이면에 있는 원리를 살피기 좋은 계절이다. 낙엽을 밟으며 한번쯤은 세상의 이면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여도 좋을 것 같다.